2024년 4월 23일(화)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조금씩 싹트고 있는 공동체 의식 모여 ‘청소년 행복지수 1위’ 국가 될 수 있기를…

지난해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옆 동에서 한 여중생이 몸을 던졌습니다. 집단따돌림 때문이었습니다. 핏자국을 보았다는 이웃도 있고, 옥상 밑 계단에서 웅크린 채 울고 있던 여중생을 보았다는 이웃도 있었습니다. 무수한 소문만이 휩쓸고 난 후, 사건은 점점 사람들 기억에서 잊혔습니다. 그리고 12월 대구의 한 남중생이 학교폭력으로 또다시 목숨을 던졌습니다. 출근길, 그 지점을 지날 때마다 저는 가끔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를 생각합니다. ‘왜 그랬니, 왜 그랬어’ 하고요.

미국 시애틀에서 2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2010년 여름, 일곱살짜리 큰딸을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얼굴색은 똑같은데, 말이 어눌하고 영어를 섞어 쓰는 큰딸은 금방 또래 여학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유치원에 간 지 일주일이 되던 무렵, 아이는 잠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가 ‘쟤는 이상하니까 놀지 마’라며 왕 노릇을 하자, 몇몇 친절하던 여학생들도 모두 자기와 친구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상황은 나아졌지만, 놀이터에서 놀 때면 큰딸은 늘 애들이 맡기를 꺼리는 술래역할만 맡았습니다.

“나대지 마라!”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 가장 심한 욕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왕따나 학교폭력 등의 사건이 반복되어도, 많은 사람은 “왕따 당할 만하니까 당했다” 혹은 “문제아들은 전학이나 퇴학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아이는 그러지 않을 거야’라고 위안을 삼기도 하지요. 공동체가 아닌 나와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이것은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하는 걸 어렵게 합니다.

청소년 문제 취재를 하면서 참 고약했던 건, “어쩔 수 없다. 해결책이 없다”는 패배감이 사회 전체에 가득했다는 점입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는 정녕 불가능할까요. 다행히 몇몇 학교와 공동체에서 가능성의 씨앗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곳이 늘어나, 제 아이의 아이가 청소년이 될 무렵 신문 지면에 ‘한국, OECD 국가 중 청소년 행복지수 1위’라는 기사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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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호 202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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