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더나은 패션’으로 가는 길…사회적기업 ‘라잇루트’

라잇루트_사회적기업_라잇루트 매장 안에 서 있는 신민정 대표 - 라잇루트 제공성수동에 위치한 사회적기업 ‘라잇루트(Right Route)’ 매장에는 같은 옷이 단 한 벌도 없다. 평상복으로 알맞은 맨투맨 티셔츠부터 패션쇼에서나 볼 법한 독특한 드레스까지. 제품 하나하나 개성이 빛난다. 청년 디자이너들이 손수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전시된 옷 위에는 디자이너의 사진과 약력이 함께 걸려있다. ‘옷을 만든 사람’에 대한 존중이 절로 느껴지는 모습이다.

라잇루트(Right Route)는 기존 패션업계의 높은 진입장벽에 가로막혀 옷을 만들어 볼 기회조차 갖기 못한 디자이너 지망생들에게 실무경험을 제공한다. 청년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을 소비자에게 유통하는 것도 라잇루트의 몫이다. 신민정(27·사진) 라잇루트 대표는 “라잇루트가 패션업계에 ‘올바른 길’을 제안하길 바랐다”며 상호명의 이유를 밝혔다. 창업자치고는 많지 않은 나이. 패션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건축설계학 전공자가 패션회사 창업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일까. 두 시간이 넘어가는 긴 인터뷰에도 그는 지치는 일 없이, 조리 있게 자신의 신념을 설파했다.

“자취집을 고르는 제1 기준이 ‘옷장의 유무’일 만큼 옷을 좋아해요. 취미로 패션블로그도 운영했고요. 자연스레 청년 디자이너들과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많았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상황이 너무 열악했어요. 최저시급도 안 지키고, 채용 기준을 신체 치수로 정하고…. 좋아하는 분야였기 때문에 그들의 고충이 마치 내 문제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요. ‘이 사람들을 위한 회사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좋은 옷을 계속 구매하려면 패션업계가 좀 더 건강해져야겠더라고요.”

◇열정페이, 몸뚱아리 차별…패션업계 ‘검은 관행’ 깨는 사회적 기업

패션업계에서 청년 디자이너들이 겪는 부조리는 하루 이틀일이 아니다. 스튜디오에 취업하려면 낮은 임금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감당해야 한다. 디자이너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한 저임금 노동력 착취는 이미 지난 2014년, 페이스북 페이지 ‘패션노조’의 폭로로 밝혀진 바 있다. 스튜디오에 처음 입사한 디자이너들은 매일 야근을 하면서도 수당 없이 30~60만원 수준의 ‘열정페이’를 받는다. 근로계약서 미작성, 최저임금 미준수, 4대 보험 미가입(요구 시 가입) 등 불합리한 관행은 정직원으로 채용된 후에도 이어진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의 주 업무가 잡일이라는 데 있다. ‘막내생활을 4-5년은 해야 디자인에 대해 조금이나마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는 식의 분위기도 팽배하다. 배움과 경험을 얻고자 수모를 감내한 청년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시간을 낭비했다‘는 자괴감과 실망감뿐이다.

55사이즈 이하만 채용하는 ‘몸뚱아리 차별’은 지망생들 사이에선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신 대표는 “피팅모델 인건비를 아끼려고 디자이너를 뽑을 때조차 신체 조건을 보는 곳이 많다”면서 “채용공고를 낼 때 아예 키 얼마, 상의 사이즈 몇 이하를 기준으로 적어놓는 곳도 있고, 면접 중에 ‘골반이 너무 크니 깎아야겠다’는 식의 성희롱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청년 디자이너들의 크고 작은 목소리를 들은 신 대표는 1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2015년 11월 사회적기업 라잇루트를 창업했다.

“라잇루트를 만들면서 영국의 ‘콕핏아트(아티스트에게 공간과 멘토링을 제공하고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적 기업)’를 많이 참고했어요. 그 곳 본사 직원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사회적기업이라고 해서 엄청난 대의가 있거나 소외계층에 도움이 되어야만 존재가치가 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무언가를 절실하게 원하지만,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회적인 가치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제게 용기를 주었죠.”

그는 라잇루트가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의 발판이 되길 바란다. 기성 패션업계의 부조리에 지친 청년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 일이 그 첫걸음이다.

라잇루트 디자이너 프로젝트의 멘토링 모습. /라잇루트
라잇루트 디자이너 프로젝트의 멘토링 모습. /라잇루트

◇ 청년에게 ‘옷 만들 기회’ 주는 ‘디자이너 프로젝트’

라잇루트의 사회적 가치를 가장 잘 보여주는 프로그램은 청년 디자이너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디자이너 프로젝트’다. 나이, 경험, 스펙, 학력과 상관없이 오직 디자인에 대한 열정으로만 프로젝트 대상자를 선발한다. 일부 재단이나 대형 편집숍에서 진행하는 신진디자이너 지원 사업이 대상을 ‘5년 이상 경력자’ 등으로 한정하는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디자이너 프로젝트에 선발된 청년들은 참여비 10만원을 내고 약 7주에 걸쳐 작품 제작 전 과정을 지원받는다. 부자재 및 원단, 작업 공간 대여, 모델 촬영 등이 포함된 금액이다. 사설 학원의 1/20도 안 되는 비용으로 경험과 경력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셈이다. 패션기업 창업을 원하는 청년에게는 멘토링도 제공한다.

“라잇루트가 지원하는 프로젝트의 결과물에는 디자이너 각자의 개성이 들어가요. 학교처럼 교수의 생각에 따라 디자인을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포트폴리오가 나오지도 않고요. 원하는 작품을 자유롭게 디자인하되, 독도·동물권·차별금지 등 기수별로 회사가 정한 공익적 주제를 담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청년 디자이너의 옷들은 ‘라잇루트’의 이름을 걸고 무신사, 크램잇 등 편집숍의 온‧오프라인 매장에서 판매된다. 디자인 저작권은 라잇루트에게 있지만, 제품에는 옷을 만든 청년 디자이너의 이름이 명기된다. 제품이 잘 팔릴 경우 옷을 만든 디자이너에게 인센티브가 주어지고, 수익은 다음 디자이너 프로젝트를 위해 투자된다.

현재까지 4번의 디자이너 프로젝트를 통해 18명의 청년 디자이너가 지원을 받았다. 이들이 만든 옷만 50여 종에 이른다. 얼마 전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이 만든 옷을 세상에 내 놓은 고수정(29)씨는 라잇루트에서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참여비와 인센티브 문제를 압도한다고 이야기했다.

디자이너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청년 디자이너들. /라잇루트 제공
디자이너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청년 디자이너들. /라잇루트 제공

“디자이너 스튜디오에 막내로 입사해도 자기 옷을 만들어볼 기회는 극히 드물어요. 레깅스나 스카프 같은 소품 디자인에 겨우 참여할 수 있는 정도죠. 하지만 라잇루트에서는 경력이 없을지라도 원하는 의류 디자인을 해볼 수 있어요. 디자이너 지망생들에게는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값진 경험이라 생각해요.”

최근 라잇루트는 단체․맞춤복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경험과 수익을 원하는 청년 디자이너들에게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하고, 안정적인 수익 모델을 창출하기 위해서다. 지난 3월에는 중기청과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사회적기업육성사업’에 선정돼 지원금 3000만원을 받기도 했다. 설립 2년차, 패션업계의 ‘바른 길’을 꿈꾸며 출범한 라잇루트는 ‘대안’으로서 조금씩 자리매김 중이다.

“지금으로서는 디자이너 프로젝트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에 ‘올인(All in)’하고 있어요. 내년 3~4월쯤 시스템이 안정화되고 나면 그때부턴 정말 온갖 시도를 다 해볼 것 같아요. 차후에는 청년들을 아예 라잇루트 소속 디자이너로 채용하거나, 프로젝트 수료생을 중심으로 디자이너 커뮤니티를 만들어 볼 생각도 있어요. 디자이너 처우 개선을 위해 ‘패션노조’가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단합 측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으니, 저희가 그 역할을 해 볼 수도 있고요. ‘대안이 되고 싶다’는 우리의 미션이 바뀌지 않길 바라요. 올바른 과정으로 만든 제품들에 올바른 메시지와 가치를 담아 판매하겠습니다.”

 

이형민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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