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34분에 1명,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살아있는 관심·생동하는 제도 절실

‘OECD 국가 자살률 1위’ 한국의 현주소
10만명당 28.4명 자살… OECD 2.5배 80세 이상 자살도 10년새 3배 급증
현실 심각한데 정부대책은 미지근 전국기관 조직·인력·시스템 확립돼야

잘되던 사업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아내는 먼저 세상을 뜨고 자녀는 아프고, 다시 집안을 일으켜 보려다 오히려 사기만 당했다. 어떻게 삶을 꾸려가야 할지 막막한 최씨(가명)는 연거푸 자살을 시도했다. 절벽에서 뛰어내렸고 한강에 몸을 던졌고 마지막엔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2007년 생명의전화 종합사회복지관 내 성북구 자살예방센터를 만나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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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자살예방센터의 ‘살자 프로젝트’는 전국 최초의 민·관협력 지역 공동사업으로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통한 통합적 자살예방사업이다. 최씨를 위해서도 지역사회 모두가 힘을 모았다. 복지관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후원자를 결연하고, 가사지원 서비스를 지원했다. 병원과 정신보건센터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했고 지역 내 자원봉사자들은 정서 상담, 바깥나들이 등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여가생활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도록 시니어 연극단도 소개했다.

프로젝트의 전반적 기획과 운영을 담당하는 김주희 팀장은 “지역사회복지관·의료기관·정신보건센터·노인복지센터·심리상담센터·경찰서 및 소방재난본부·주거복지센터·자원봉사센터·주민자치센터·학교 등 다양한 기관들이 협력하고 있다”며 지역사회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우리나라는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가 28.4명(2010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차지한다. 이는 OECD 회원국 평균(11.4%)의 2.5배에 달하는 수치로, 2003년부터 8년째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9년 자살 사망자는 1만5413명. 34분에 1명이 스스로 생명을 끊고 있는 셈이다. 2009년 한 해 동안 초·중·고생 202명, 대학생 24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구 10만명당 80세 이상 노인 자살자도 47.3명(1999)에서 127.7명(2009)으로 10년 사이 세 배 이상 급증했다.

자살을 비롯해 다양한 삶의 고민과 갈등에 대해 누구나 전화상담(1588-9191)을 받을 수 있다.
자살을 비롯해 다양한 삶의 고민과 갈등에 대해 누구나 전화상담(1588-9191)을 받을 수 있다.

심각한 자살문제를 해결하고자, 보건복지부는 제2차 자살예방종합대책을 2009~2013년의 5개년에 대해 수립하며 10대 과제를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2년 반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추진 실적은 없다. 정책과제는 수립했으나 추진할 예산이 없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의 위환 서기관은 “그간 법적 근거의 부재 등을 이유로 충분한 예산 지원을 받지 못했다”며 “지난 3월 자살예방법을 통과시키며 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우선 올해 14억3000만원의 예산을 확보했기 때문에 앞으로 보다 실질적이고 적극적으로 과제들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 덧붙였다. 그러나 실질적 예산 확보방안이 없는 종합대책만을 발표한 채 별다른 추진 성과가 없는 정부의 계획에 신뢰의 시선을 보내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스냅샷으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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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소극적 대응에 대한 안타까움은 자살예방사업 현장의 실무자들이 더 크다. 진천군정신보건센터의 이연숙 간호사 역시 정부의 관심과 지원을 강조했다. “정신보건센터나 종합사회복지관, 노인복지관 등에서 기존의 업무에 추가로 자살예방사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업무 과중, 예산 부족 등으로 제대로 진행하기가 힘들죠. 지역 내 운영체계가 세워지는 게 가장 급선무인 것 같습니다. 자살예방체계가 확립되고 전담조직과 인력, 예산 등이 확보되어야 실질적인 사업들이 펼쳐질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유관 기관들의 참여도 쉽게 유도할 수 있을 거고요.”

이씨는 농어촌 지역에 대한 관심도 부탁했다. “농어촌 지역은 독거노인을 비롯한 노인인구가 많고 군부대도 많다 보니, 오히려 자살문제에 대한 관심이 더 필요한 곳입니다. 그러나 복지 인프라는 농어촌 지역이 도시지역에 비해 더 취약한 경우가 많죠. 자살예방 관련 체계를 확립하는 노력을 기울일 때, 도시형뿐만 아니라 농어촌에 맞는 모델 확립도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내 협력체계 구축도 중요한 과제다. 이를 위해, 지난주에는 자살예방사업 관련 실무자 및 관계 전문가 30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네트워크를 통한 자살예방사업 활성화 워크숍(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주최, 한국생명의전화 및 한국자살예방협회 주관)’을 갖기도 했다. 자살예방사업에 대해 관련 민간기관부터라도 실질적 협력을 쌓자는 취지다.

홍강의 한국자살예방협회 이사장은 “효과적인 자살예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관계 기관의 협력체계 구축”이라며 “이번 워크숍이 전국적 민·관 협력체계 구축의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며 기대감을 표했다. 워크숍에 모인 실무자들은 정부의 기틀 마련, 실무 현장 내 협력체계 구축과 함께 “사회의 관심을 부탁한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보건복지부_그래픽_자살예방_10대과제_2011수원생명의전화 조경숙 소장은 “관심 제고, 인식 개선이 추상적인 슬로건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시스템, 제도 등에서 하나씩 구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집 전화로 걸려온 상담전화에 대해서는 발신자 추적이 불가능해요. 위급한 상황에서도 내담자에게 이름과 주소를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게 현실입니다. 사회적 관심이 모이면 이러한 시스템의 한계들을 하나씩 해결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대상이나 이슈를 찾아내는 눈, 가르치는 입이 아니라, 들어주는 귀, 먼저 내미는 손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의 ‘살아 있는’ 관심이 가득할 때,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용기를 얻고, 시스템도 개선되고,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바뀔 수 있습니다.”

조 소장의 말처럼 자살문제를 한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하며, 살아 있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보다 행복한 대한민국’의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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