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목)

“온몸이 마비돼가도 공부는 포기 못해”

희귀·난치성질환자 위한보조기기 보급·지원 절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올해엔100명에게 학습용 보조기기 지원

남윤광(27)씨는 ‘척수성근위축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척수성근위축증은 유전성 질환으로, 근육이 천천히 말라붙고 마비되는 질환이다. 손가락 몇 개와 얼굴 근육을 빼고는 움직일 수 없는 탓에, 밥을 먹을 때도, 옷에 단추를 채울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항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남들에겐 너무나 쉽고 당연한 것도 남씨에게는 버겁고 힘든 일이다.

휠체어에 앉아 자리를 잡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남윤광씨는“페이지터너 덕에 누워서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게 가장 좋다”며“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어려운 이웃에게 작게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제공
휠체어에 앉아 자리를 잡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남윤광씨는“페이지터너 덕에 누워서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게 가장 좋다”며“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어려운 이웃에게 작게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제공

그런 남씨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공부’다. 작년 8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이다.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받아 적거나 도서관에서 필요한 책을 찾아 빌리는 것도, 심지어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도 혼자 힘으론 쉽지 않았지만 남씨는 7년 반 만에 당당히 졸업했다.

“병세가 점점 나빠져서 급기야는 책장을 넘기는 것조차 누군가 도와줘야 했습니다. 자료 조사를 할 때면 이 페이지, 저 페이지를 들추며 필요한 정보를 찾아야 하고요. 그때마다 매번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하니 마음껏 공부하기도 힘들고, 활동보조인이나 봉사자 등에게도 항상 미안한 마음, 불편한 마음이었죠. ‘페이지터너’를 지원받으면서 달라졌습니다. 마음껏 공부도 하고 책도 읽었습니다. ‘페이지터너’는 단순히 책장을 넘겨주는 기계가 아니에요. 제 병을, 제 인생을 넘겨주는 ‘라이프터너(life-turner)’예요.”

‘페이지터너’는 리모컨으로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고안된 기계다. 이처럼 장애인의 손상된 신체 기능을 유지하거나 향상시키기 위해 고안된 도구들을 ‘보조기기’라 한다. 일상생활 및 의사소통을 돕는 보조기기에서부터 학습, 운동, 컴퓨터 사용 등을 돕는 보조기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이 후원하는 한벗재활공학센터의 최운호(34) 팀장은 “사소한 일 하나를 처리할 때도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하는 것이 큰 부담인데 보조기기를 활용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라며 보조기기의 의의를 강조했다.

그러나 아직은 희귀·난치성질환자들에게 ‘페이지터너’와 같은 첨단 기술 기반의 보조기기, 특히 학습지원 보조기기는 멀게만 느껴진다. 가장 큰 이유는 보조기기에 대한 낮은 인식이다. 한벗재활공학센터의 최 팀장은 “심지어 장애인조차 보조기기가 뭔지, 어떤 보조기기들이 있는지 등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장애인 및 일반인들의 인식과 관심이 적으니 정책화·법제화의 노력과 관심이 적은 건 당연한 결과죠.”

한벗재활공학센터에서 희귀·난치성질환 환아 및 부모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학습용 보조기기를 사용한 적이 없는 이유로 환아 및 부모들은 ‘보조기기에 대한 정보 부재(33.3%)’를 가장 높이 꼽았다. 영동세브란스병원 근육병 환우 부모모임인 호흡재활회 박명환(56) 회장 역시 “우리 모임에 있는 분들은 다 자녀가 근육병을 앓고 있는데도 보조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꾸준한 정보 제공 및 홍보를 강조했다.

“이런 게 있는 줄 모르면 당연히 서비스를 사용하지 못할 수밖에 없잖아요. 지금은 아들이 책을 보거나 공부할 땐 페이지터너에 맡기고 잠시 쉴 수 있는데, 만약 이런 걸 몰라서 사용하지 못했다면 아들도 저도 너무 힘들었겠죠.”

관련 전문가들의 인식과 관심의 제고도 중요하다. 최 팀장은 “과학기술 분야뿐 아니라 의료계와 재활치료계, 특수교육계, 사회복지계 등 다양한 영역과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보조기기의 높은 가격이다. 남씨가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도운 ‘페이지터너’의 가격은 770만원. 대부분의 첨단 기술 기반의 보조기기의 가격 역시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에 달한다.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의 김종배(49) 재활보조기술연구과장은 “장애인이 쉽고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과 같은 세심한 동작들을 보조해야 하니 첨단기술이 들어가야 할 수밖에 없다”면서 “가격의 대중화를 위해선 정부나 관련 재단 등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희귀·난치성 질환자 대상의 주요 복지 사업은 의료비 지원 및 최소한의 보조기기 지원에 그친다. 호흡보조기나 기침유발기와 같은 생명유지에 직결되는 보조기기와 의수(義手), 의족(義足), 휠체어와 같은 거동을 위한 최소한의 보조기기 지원이 대부분이다. 여전히 대부분의 일상생활, 학습 등은 가족에게 맡겨져 있다. 올해로 4년째를 맞는 정보통신보조기기 보급사업이 점점 확대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50만 명으로 추정되는 희귀·난치성질환자들의 필요를 채우기엔 여전히 부족하다.

이에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올해 100명의 희귀·난치성질환자들에게 학습용 보조기기를 맞춤제작 및 대여·교육 서비스를 제공한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2008년 삼성생명·교보생명 등 16개 생명보험사들이 공동으로 기금을 출연해 설립한 공익재단이다. 주요사업 중 하나로 희귀·난치성질환자 진료비 및 보조기기를 지원하던 중, 올해에는 학습지원에 초점을 두고 보조기기 지원 사업을 운영한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의 이시형(77) 이사장은 “희귀·난치성질환을 겪고 있는 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꿈과 희망을 계속 키워나가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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