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Cover story]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①’잡 팩토리’의 로버트 로스

“시작은 사명감으로, 생존은 기업가 정신으로”
2000년 정부 지원 끊겼지만 실업 청소년 위해 포기 안 해
연간 매출액 약 99억원… 사회적 비용 절감 약 93억원

돈 버는 일? 어렵다. 직원들 월급 주며 사장 노릇 하기? 더 어렵다. 게다가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주려고 사업을 벌인다면? 불가능한 꿈이다.

하지만 이런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혼자가 아니기에, 그리고 꿈꿀 만한 가치가 있기에, 이 악물고 도전한다.

지금 세계를 바꾸고 있는 ‘사회적 기업가’들은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회사를 차리는 게 아니라,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회사를 차린다. 이자를 벌기 위해 은행을 하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자립할 돈을 꿔주기 위해 은행을 만든다. 어려운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에 맞는 병원을 짓고,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싼 전기를 제공한다. ‘욕심’을 버리니 세상이 바뀐다. 전 세계 사회적 기업가는 100만명을 넘어섰다.

조선일보 공익섹션 ‘더 나은 미래’는 ‘세상을 바꾸는 사회적 기업가’들을 찾아 지난 3개월간 유럽과 미국, 아시아를 누볐다. 나라마다 대륙마다 사회적 기업가의 철학과 비전도 달랐다. ‘공동체’를 주장하는 시민운동가에 가까운 사회적 기업가부터, 철저히 시장 마인드로 무장한 사회적 기업가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회적 기업가들의 심층 인터뷰와 분석을 통해 한국형 사회적 기업의 가치를 찾아보려 노력했다.

잡 팩토리를 졸업한 청소년 인턴들이 취직을 하면 '축하의 벽'에 사진과 사연이 붙는다. 로버트 로스에게 잡 팩토리를 상징하는 사진을 부탁하자, 즉시 이 벽을 가리켰다. 이 벽은 로버트 로스의 신념의 장소이자, 잡 팩토리의 인턴들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장소이다. / 잡 팩토리 제공
잡 팩토리를 졸업한 청소년 인턴들이 취직을 하면 ‘축하의 벽’에 사진과 사연이 붙는다. 로버트 로스에게 잡 팩토리를 상징하는 사진을 부탁하자, 즉시 이 벽을 가리켰다. 이 벽은 로버트 로스의 신념의 장소이자, 잡 팩토리의 인턴들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장소이다. /잡 팩토리 제공

첫 번째 인터뷰는 스위스에서 이뤄졌다. 청소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0년 ‘잡 팩토리’를 설립한 로버트 로스(Robert Roth·60)씨가 주인공이다. 다보스포럼의 창립자인 슈밥이 만든 슈밥재단(Schwab Foundation)은 ‘잡 팩토리’가 연간 860만 스위스프랑(약 93억원)에 해당하는 사회적 비용을 절감한다고 했다. 지난 한 해 ‘잡 팩토리’의 매출액은 964만 프랑(약 99억원). 과연 세계의 어떤 기업이 매출액만큼의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까. 로스씨는 “잡 팩토리가 만들어졌던 시기의 스위스를 돌아보면, 그 가치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2000년 당시 스위스는 근로 가능한 연령대의 체감 실업률이 무려 20%에 이르렀다. 정부가 일자리 만들기와 실업 급여 지급에 돈을 쏟아 부었지만, 실업 문제는 해결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로스씨는 “계속되는 재정 부담에 정부도 ‘할 만큼 했다’며 손을 떼던 때였다”고 기억했다.

“저는 1976년부터 신체장애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청소년들을 고용해 장난감을 만드는 수공예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정부 지원으로 운영을 했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막막해진 셈이었지요.”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실업 청소년들을 버려둔 채 나 하나만 살아남기 위해 바둥거리며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부모로서, 또 어른으로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고 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정부 지원에서 벗어나 철저히 시장 경제 안에서 살아남기로 마음먹었다. 부엌 가구 만들기, 웹 개발과 디자인 등 청소년들이 쉽게 배워서 할 수 있는 사업 영역을 정하고 ‘잡 팩토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시작은 쉽지 않았다. ‘잡 팩토리’에서 일하는 청소년들이 만든 물건을 사 주는 기업도, 또 인턴십을 한 청소년들을 고용해주는 곳도 없었다. 정부의 도움 역시 바랄 수 없었다. 로스씨는 “바젤 시 정부조차 얼마 못 가 문을 닫을 것으로 봤다”며 “가능성마저 찾지 않으려는 싸늘한 시선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수없이 맞은 부도 위기.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청소년들을 독려해 물건을 만드는 한편, 기업들을 하나씩 찾아다녔다.

10년이 지난 지금 ‘잡 팩토리’는 사회적 기업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지난 10년간 매년 300여명의 청소년이 인턴십을 수행했고, 그 중 70%가 취업 혹은 진학에 성공했다. 작년 한 해 매출액은 964만 스위스프랑(약 99억원). 경제위기에도 전년 대비 11% 성장했다. 인건비, 원자재 값 등 모든 비용을 제외한 22만7000프랑(약 2억3300만원)의 이익은 모두 직업 훈련 재단(Job Training Foundation)에 기부되어 청소년 인턴들의 직업 교육과 코칭에 쓰인다. 현재 ‘잡 팩토리’ 인턴십을 마친 청소년들을 고용하거나, 그들이 만든 제품을 구매하는 기업은 무려 500여개에 달한다. 2005년에는 슈밥 재단에서 주는 사회적 기업가 상을 받고,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초청받기도 했다.

불과 10년 만에 이런 성공을 거둔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사회적 기업의 핵심은 사회에 대한 영향력과 사명감”이지만 “한편으로는 ‘기업’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기업이라는 것을 잊는 순간 생존 가능성이 낮아지고, 세상이 나를 몰라 주는 것 같아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경쟁’에 의한 생존보다는 ‘상호 부조’에 의한 공존을 얘기할 것 같았던 그가, 이렇게 ‘기업가 정신’을 얘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시장은 냉혹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과 사회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갖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요. 소비자는 ‘사회적 기업’이라고 해서 그냥 물건을 사주지 않습니다.”

사회에 대한 사명감을 유지하면서도 시장 경제 체제에서 생존하는 것. 불가능한 꿈 같지만 그는 오늘도 다시 도전한다고 했다. “꿈이 있으면 당장 시작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리고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바젤=허인정 기자 오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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