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금)

배우 손현주가 장애어린이 합창단을 만든 사연

25년째 연기한 프로배우
합창단과는 11년간 함께해
홍창진 신부와 구상하고
18명의 장애아동 모여 시작

토요학교·댄스교실 등
다양한 문화프로그램 운영
최근 청년합창단도 만들어
작은 시도로 행복해졌어요

박창현사진작가_사진_손현주5_2016
“우리 애들이 노래 잘하냐구요? 어휴, 못하죠(웃음). 대신 세상 누구보다도 밝고 행복하게 부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첫 소절이 ‘나 딴 아이들처럼~ 예쁜 인형은 없어도~(그는 이 대목에서 직접 노래를 불렀다)’라고 시작하는데, 10년 넘게 수도 없이 들은 이 곡이 왜 번번이 가슴 찡한지 모르겠어요.” 손현주 단장은 ‘에반젤리를 자랑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사랑스러운 농담으로 답했다.

 

배우 손현주(51)의 책임감은 연예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촬영시작 한 시간 전부터 현장에 나타나 스태프를 독려하는 그의 모습은 작품을 함께한 선후배들 사이에서 늘 화제가 되는 에피소드다. 진득함도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대학로 연극배우로 오랜 시간을 보낸 끝에 1991년 KBS공채 탤런트에 선발됐고, 11년 만에 연기대상까지 받았다. 

그의 책임감과 진득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한 가지 더 있다. 2005년 직접 창단해 지금까지 단장직을 맡고 있는 장애어린이합창단 ‘에반젤리’가 그것이다. 일반적인 ‘연예인 얼굴마담’과는 차원이 다르다. ‘장애어린이로 구성된 합창단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부터, 창단자금을 모으고 운영하는 일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인기 배우가 비영리단체에서 장애어린이 90명과 함께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올해로 11년째 ‘에반젤리’를 이끌어온 손현주 단장을 지난 8일, 화양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에반젤리_사진_손현주_에반젤리합창단6_2016

 

 

◇손현주와 오합지졸 합창단, 개미후원자를 만나다

2004년 어느 날, 배우 손현주와 홍창진 신부는 수다를 떨고 있었다. 

“당시 드라마 ‘러브레터’에서 사제 역할을 맡았는데, 홍 신부님의 자문을 받으면서 친해졌어요.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주 나눴죠. 어느 날 홍 신부님이 ‘성가대 아이들 보면 노래 부르고 무대 서는 것을 참 좋아하던데, 왜 합창단에 장애인 아이들은 없을까’ 하시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정말 궁금했어요. 겁도 없이 ‘우리가 만들까?’ 해버렸는데, 그게 진짜 현실이 됐네요.”

SAMSUNG CSC

그해 겨울, 손현주와 홍 신부는 에반젤리 창단 비용 마련을 위해 부랴부랴 일일호프를 준비했다. 합창단의 투명한 운영을 위해 홍 신부가 이사장으로 있는 비영리단체 ㈔마음은행이 모체가 됐다. 이듬해 1월, 오디션을 거쳐 18명의 장애어린이가 에반젤리의 첫 합창단원으로 모였다. 인근 복지관 등에서 소식을 듣고 ‘나도 친구들과 노래를 해보고 싶다’며 찾아온 아이들이었다.

시작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단원 중 무대에 서본 사람은 고사하고, 악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발달장애인이 대다수인 합창단이 한 곡을 부르기 위해 필요한 연습 시간은 무려 6개월.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연습해도 아이들의 공연을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스태프도 늘 부족했다. 지휘자 외에도 인솔자가 최소 두세 명은 더 필요했다. 대중교통으로 공연장까지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성복이 맞지 않는 아이들도 많아 단복은 매번 치수를 재서 새로 제작해야 했다.

“배우 일 하는 사람이 합창단 운영에 대해 얼마나 알았겠습니까.”SAMSUNG CSC

손 단장은 수많은 어려움에도 지금까지 에반젤리가 유지된 것은 주변사람들 덕이라고 했다. 창단 초기 자신의 음식점을 공연장으로 선뜻 내주었던 지인, 공연 스태프를 자청해준 중앙대 후배들과 이제는 ‘프로봉사자’가 돼버린 팬클럽 ‘뚝배기’ 회원들, 매번 에반젤리를 직접 찾아와 단복 치수를 재주는 동대문 옷가게 사장님과 지방 공연이 있을 때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언제든 버스를 내주는 운송업체 대표님 등 고마운 사람의 수를 세자면 끝도 없다. 고명환∙이필모∙김성령∙보아∙소향∙장윤정 등 오래된 ‘절친’부터 손 단장도 모르게 힘을 보태준 이들까지 연예인 동료의 도움도 뒤따랐다.

“에반젤리에는 수 년째 쌈짓돈을 기꺼이 내주시는 정기기부자가 300분 정도 계세요. 아이들이 노래를 통해 어떻게 성장해가고 있는지 오랜 기간 지켜봐주신 분들이죠. 처음에는 18명으로 시작한 에반젤리가 90명이 넘는 아이들을 품을 수 있게 된 것도 ‘개미 후원자’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에반젤리를 위해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선 것은 손 단장 자신이다. 스스로를 ‘앵벌이’라고 거리낌없이 말할 정도다. 인기배우가 되기 전부터 꾸준히 사비로 운영자금을 지원한 것은 물론, 단막극 출연료와 문화행사 개런티를 기부하는 등 기회가 될 때마다 ‘내 몫은 에반젤리에 보태겠다’고 한다. 평소 친분이 있던 완도군청 직원들은 아예 손현주 팬클럽을 결성, 기부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환자가족, 의료진, 장기기증자의 밝은 모습을 촬영해 재능기부 할 정도로 사진에 일가견이 있는 그답게 아이들의 공연 모습을 렌즈에 담는 것 또한 손 단장의 일이다.

“단장의 권위요? 이름만 그렇지 사실 에반젤리에서 서열은 제일 낮아요(웃음). 이 녀석들이 절 어찌나 하찮게 보는지 ‘오늘 노래연습 열심히 했어? 목소리가 왜 이렇게 작아?’ 하고 물으면 ‘단장님보다 잘 하거든요!’ 하면서 핀잔을 준다니까요.”

 

◇초등생 단원이 어엿한 성인으로…아이들과 함께 커온 11년

에반젤리는 어린이 합창단으로 알려져 있지만, 장단노리패, 댄스교실, 미술교실, 탁구교실 등 다양한 문화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2014년부터는 중ㆍ고등학생을 위한 청소년 합창단과 20세 이상을 위한 청년 합창단도 운영 중이다. 공식 홈페이지 이름도 ‘장애어린이 합창단’이 아닌 ‘장애청소년 사회문화센터’라고 바꿔달았다. 합창단이 어쩌다 문화센터가 됐을까. 아이들이 자랐기 때문이다. 에반젤리에서는 한 번 단원이 되면 본인이 원할 때까지 몇 년이고 활동할 수 있다. 현재 소속된 단원들의 평균 활동기간은 5~6년. 창단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단원도 있고, 합창단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성인 단원도 있다.

에반젤리_사진_손현주_에반젤리합창단7_2016

“4~5년 지나니까 남자아이들은 변성기가 와서 노래를 부르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상급학교로 올라가거나 성인이 된 친구들이 ‘어린이’ 합창단을 계속 할 수도 없고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활동 위주로 수업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연습이 없는 아이들도, 성인이 된 아이들도 일요일을 빼면 매일 에반젤리에 와서 하고 싶은 걸 하다가 갈 수 있어요.”

손 단장의 요즘 최대 고민은 성장한 아이들의 일자리다. 장애인사업장에 취직한 친구도 있지만, 극히 일부다. 부쩍 연애에 관심이 많아진 청소년기 친구들에게도 신경이 쓰인다. 손 단장은 “내 눈에는 아직도 꼬마 때 모습 그대로인 것만 같은데 눈 깜짝할 새 다들 어른이 됐다”면서 여느 가정의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미소를 지었다.

“요새는 지나가다가 취업공고만 보면 에반젤리 사무국장님한테 전화를 걸어요. ‘괜찮은 구인 쪽지를 봤는데 말이야, 소영(가명)이는 어때?’ ‘이 정도는 우리 애들도 할 수 있지 않아?’ 하고요. 친구들마다 특성도 다르고, 업체 사정도 고려해야 하니까 대부분은 퇴짜를 맞죠. 대우도 잘 받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좋겠는데, 애들 취업 생각을 할 때면 가슴이 무너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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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젤리는 최근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직업교육장으로서의 고민을 시작했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불안한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지지하는 역할을 계속 해 나갈 생각이다.

손 단장은 “단체가 커질수록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예전처럼 신경 써줄 수 없을까봐 늘 노심초사한다”면서 “오늘 이 친구의 기분이 어떤지,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챙겨줄 수 있을 만큼의 크기를 유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큰 기부금이 들어와도 단체의 취지에 맞는지 고심해서 받는다. 에반젤리만의 색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보조 위탁사업도 하지 않는다.

“아직도 처음 정우(가명)의 목소리를 들었던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완전히 거부하던 아이였거든요. 어느 순간 정우가 작게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노래를 하다니! 가슴이 뭉클했죠. 이 나이가 돼서 골프도 칠 줄 모르지만 저는 행복합니다. 에반젤리 아이들을 만난 후 얻은 게 훨씬 많거든요. 뭔가를 나누려면 거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께, 처음 저와 홍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조금만 옆으로 돌려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마 작은 시도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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